진실을 기록하는 여정

권력의 잔혹함을 증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줬던 <진실의 힘> 국가폭력 희생자선생님들이 한분두분 떠나시고 있다. 증언할 이들이 사라지고 난 후, 세상은 어떻게 과거와 대화할 것인가?

<진실의 힘>은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만든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기록을 시작한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역사를 담아두고자 한다. 그래야 후세가 그들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정당하게 ‘애도’하지 않겠는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이야기’, ‘꿈에서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재심 법정에 서기 전까지,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지난 사건’은 이렇게 요약됐다. 그들이 그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말하고, 세상에 알리면서 역사는 다시 시작됐다.

세상은 피해자의 생(生)에만 주목한다. 국가폭력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형선고를 받고, 장기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채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낸 그들의 생(生)을 주목한다. 그들이 감옥 밖을 나와 ‘아직도 끝나지 않는 고통’과 싸우고, 자기 삶의 진실을 찾아 길고 긴 법정 싸움을 하고, 자신의 고통을 넘어 다른 희생자들에게 연대의 손을 잡고, 함께 극복해 나가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이 피해자 이전에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세상은 이미 다 잊어버린 것일까?

<진실의 힘>의 기록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한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기록한다.

<진실의 힘> 기록 작업은 故이수례, 故한등자, 박동운, 박근홍 등이 연루된 ‘진도 간첩 조작 사건’부터 시작한다. <진실의 힘>의 국가폭력 사건 중 가장 많은 피해자가 나온 사건이다. 이어서 임봉택, 오주석 등 <진실의 힘>의 주춧돌을 놓은 국가폭력 피해자 선생님들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모든 기록은 ‘물음표에서 시작한다. 질문은 공감이기도 하고, 해석이기도 하다. <진실의 힘> 기록 작업의 질문은 박미옥 선생이 맡았다. 그는 ‘진도 간첩 조작 사건’의 고 박경준 선생 딸이자 박동운 <진실의 힘> 이사장의 사촌 동생이다. 국가폭력의 피해자이었던 그가 직접 기록자가 된 것이다. 처음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박미옥 선생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다시 그 고통의 시간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고 했다. 그런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우린 각자도생이었어요. 남한테는 물론이고 우리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안 해봤어요”

감옥에 갇힌 사람은 사람대로, 밖에서 모진 수모와 냉대를 받아야 했던 사람은 또 그대로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각자 지고 있는 짐이 무거워, 서로 기댈 수도 없었다. 박미옥 선생도 손아래 동생들이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박동운 이사장과 박미옥 선생/ 진실의 힘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통

초여름 소나기를 뚫고, 박동운 이사장 댁 거실에 박동운과 박미옥, 그리고 박주홍이 마주 앉았다. 지난해, 박근홍 선생과 안금자 선생을 한 이후, 두 번째 인터뷰 자리다. 코로나19로 주춤했던 인터뷰를 방역 단계가 낮아지면서 재개했다.

이미 여러 언론과 <진실의 힘>의 여러 행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박이사장이지만, 아직도 못다 한 말, 못 들은 이야기가 있다. 6.25 때 실종된 박동운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금기시됐다.

박미옥 : 사건의 시초가 큰아버지, 오빠한테는 아버지시죠,
안기부가 큰아버지가 월북했다가 남파됐다며 우리 가족을 간첩으로 몬 것이잖아요. 오빠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디까지 있어요?

박동운 : 하나도 없어. 내가 5살 때 실종됐는데, 나는 전혀 생각 안 나. 사건 난 후에 보니, 너희 아버지(박근홍, 박동운의 동생)가 아버지 사진을 갖고 있었대. 근데 그거를 안기부에서 다 갖고 가 버렸지. 그러니까 아버지 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지.

박미옥 : 그렇게 고생할 때, 마음 한켠으로라도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어요?

박동운 : 나는 그러지는 않았어. 광주교도소에서 너희 아버지랑 같이 복역하면서 자주 만났어. 그때 그러더라. 이건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 때문에 생 긴 일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아버지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지.

뒤를 이어 남영동의 극악무도한 고문과 사형선고가 내려졌던 법정, 18년간의 수형 생활 이야기가 이어졌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메어오는데, 박동운 이사장은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이다.

박동운 : <진실의 힘>에서 정혜신 선생이랑 심리 치료할 땐 많이 울었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쳐 오더라고. 그런데 정선생이 당신은 간첩이 아니라고, 그 힘든 시간을 버텨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말해주는데, 내가 그제서야 좀 진정이 되더라고. 그런 이해를, 그런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그 후로는 내가 이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아.

이해와 인정, 지지와 연대.

그것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한없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다시 마주하는 용기’를 내는 이유다. <진실의 힘>의 기록 작업은 바로 이 공감과 지지를 이어가기 위한 일이다.

박주홍은 박미옥의 막내 동생이다. 사건이 났을 때, 박미옥은 전남대 학생으로 광주에 있었고, 박주홍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큰 누나인 박미옥은 막내 동생이 그 충격적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마음이 쓰이면서도, 아버지가 사라진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내느라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박미옥 : 사건 나고 나서, 광주로 전학갔잖아? 그땐 어땠어?

박주홍 :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 일요일에 아버지 면회를 갔다 왔는데, 다음날 학교 갔더니 친구들이 나한테 뭐 했냐고 묻더라고. 그런데 대답을 할 수가 없잖아.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물어본 건데, 내가 스스로 주눅이 들어버렸어. 그러니 친구를 사귈 수가 없지

처음으로 털어놓는 소년 박주홍의 이야기에 세 사람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다. 큰 아버지와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시간 동안 박주홍은 마음의 감옥에 붙잡혀 있었다.

대낮에 시작한 인터뷰는 긴 여름 해가 꼬리를 감출 무렵 끝이 났다. 다음날은 박동운, 박미옥 선생의 고모인 박미심 선생과 고모부 허현 선생을 인터뷰했다.

박미심 선생과 허현 선생 / 진실의 힘

기록 – 오늘의 일상을 지키는 힘

세상은 말한다. 이제 다 지난 일 아니냐고, 설마 그런 일이 또 있겠냐고. 과연 그럴까? 그 망각 속에서, 그 외면 속에서 2013년 ‘서울시 공무원 조작 간첩 사건’이 발생했고, 국가폭력 희생자가 이어지고 있다.

<진실의 힘>의 기록 작업은 과거 국가폭력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기록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