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솔 후원회원, 생명과학 박사│

어느 과학자에게나 주어지는 흔한 기회는 아니지만, 종종 ‘업계 밖에서’ 즉 과학전문매체가 아닌 대중매체에 자신의 연구성과나 전문분야의 지식에 대해 설명하는 기회가 과학자들에게 올 때가 있다. 많은 선배 과학자들에게 들은바 이때 가장 난감하면서도 꽤 흔히 듣는 첫 질문은 대체로 이렇다.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무조건 쉽게 설명해주세요.”

‘과학자’라고 하면 흔히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골몰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실은 과학자들은 탐구활동 이상으로 늘 무언가를 설명하는 데에 골몰하며 살아간다. 작게는 실험실 동료들과의 대화나 랩미팅부터, 국내학회, 국제학술대회 등에서 끊임없이 연구 과정과 결과를 공유해야 하고, 그 결과를 일목요연한 논문으로 정리해내야 하며, 발표심사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와 연구성과를 심사위원들에게 납득시키고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늘 머리를 싸매며 궁리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학위과정을 지도하는 연구자들의 경우 강의준비는 물론이고, 관심 있어 하는 학생에게 자기 연구의 장밋빛 청사진을 그려 보여주어 지도학생으로 끌어들일 준비도 늘 되어 있어야 한다. 즉 직업과학자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업계 내에서’ 만큼은 설명의 달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무조건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업계 밖에서’ 마주하는 이런 질문 앞에서는 설명의 달인들도 곤혹에 빠진다.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나. 간단하게 말하자니 빠지는 내용이 많아 설명이 안 되고, 자세히 깊게 들어가자니 꺼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따지고 보면 모든 전문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하려다보면 그에 앞서 숙지해야 할 지식이 알감자 줄기처럼 줄줄이 딸려 나온다. 그런데 그런 복잡한 이야기들 중에서 핵심만 뽑아내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만한 수준으로 쉽게 풀어 내놓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딱히 과학자들만 겪는 곤란은 아니다. 과학뿐 아니라 어떤 분야든 인류에게 쌓인 지식은 이미 복잡다양하며, 상세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렵고 복잡한 정보를 쉽게 풀어 이해시키는 것은 실로 귀한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방송채널이나 SNS 등을 통해 편리하게 접근 가능한 쉬운 설명 콘텐츠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실로 축복이다. 바야흐로 1인 콘텐츠의 시대가 도래한 세상에서 차고 넘치는, 설명의 달인들이 선보이는 쉽고 재미난 지식 콘텐츠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전문영역을 쉽게 전달해내지 못했음을 체감하며 상대적으로 빈곤한 자신의 책무이행 능력에 대해 자책감에 빠지는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쉬운 컨텐츠들은 포장지뿐 아니라 내용물까지 쉬운 경우들이 적지 않고 그렇게 얻은 지식들은 얕은 깊이로 인해, 스스로 이해했다는 만족감을 주는 데 까지만 그 역할을 다한 뒤 독자나 시청자의 머릿속에서 이내 휘발되어버리곤 한다. 더 나아가 포장지와 아예 다른 정보, 심지어는 사용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현혹하는 틀린 이야기들을 그럴싸하게 담고 있는 위험한 콘텐츠들도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분별없이 섞여 있다.

그런 사례들을 일상 중에 수없이 접하며, 우리가 진실을 찾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쉬운 설명’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고 좇아야 할 덕목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간단명료함으로 해체되기 전까지는 복잡다단함이 가지는 가치란 정녕 없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에게 쉬운 이해를 원하고 강요하는 걸까.

단순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

비교적 널리 알려진 논리학 용어 중에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 불리는 개념이 있다. 14세기 영국의 철학자 오컴의 신학논리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여러 가설이 난립할 때 가장 적은 가정을 필요로 하는 단순한 논리가 진실일 가능성이 높기에, 불필요한 비논리적 가정들은 사유의 면도날로 잘라내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잘못된 논리일수록 그 논리를 변명하기 위한 수많은 예외와 단서조항이 붙을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교리로 굳게 믿던 막강한 교회권력의 탄압을 받았지만 결국 지동설이 과학적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은, 새로이 관측되는 천체의 움직임을 천동설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규칙이 지동설에 비해 말도 안 되게 복잡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컴의 면도날은 이처럼, 논리적으로 단순한 명제가 진실일 확률이 높다는 개념으로서 “단순성의 원칙” 혹은 “논리절약의 원칙” 등으로도 불린다.

ⓒabyss.uoregon.edu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입각한 천체들의 궤도. 새로이 관측된 천문학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원궤도들이 점차 추가되었고, 결국 폐기되고 만다.

굳이 이런 용어를 접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생각회로에는 이미 그런 사고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어려운 부연설명과 예외사항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복잡한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명쾌해서 한 번에 이해가 가는 논리에 본능적으로 마음이 끌린다.

실제로 우리의 뇌는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즉시 재구성해 받아들인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어렵게 뒤섞인 정보들 사이에서 사전에 입력되어 있는 친숙한 형태의 정보들을 빠르게 찾아내어 선택적으로 취한다. 이러한 선택적인 정보습득은 생존과 직결된, 수백 만 년 동안 진화되어온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한 예로, 우리의 눈동자를 통과한 빛은 공평하게 망막에 맺히지만, 우리 신경회로는 그중에서 사물의 경계선을 더 집중하여 인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심지어는 실제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의 신경계가 주관적 윤곽선(subjective contour)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인식하기도 한다. 윤곽선을 통해 대강의 형태를 파악하고 그 사물의 정체를 빠르게 인지하는 것이 생존에 중요하기에 당연한 현상이다.

ⓒoocities.org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삼각형과 물결모양의 곡선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복잡한 시각적 정보 속에서 윤곽선을 인지하는 메커니즘이 우리 시각체계에 특별히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청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데, 널리 알려진 예로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로 불리는 현상이 있다. 아무리 칵테일파티에서 시끄러운 대화가 난잡하게 오가는 중에도, 관심도 없던 다른 테이블의 대화 속 어디선가 자기의 이름이나 자신의 관심사가 들리면 그쪽으로 귀를 쫑긋하게 된다. 이는 그저 우리의 기분 탓인 게 아니라, 우리의 뇌가 미리 저장된 감각기억(sensory memory)을 기반으로, 뒤섞여 들려오는 복잡한 대화들 속에서 재빨리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필요한 정보들을 선택적으로 지각(selective perception)하는 신경학적 현상이다.

필요하지 않은 정보들을 빠르게 솎아내고 필요한 것만 취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매우 필수적인 전략이다. 또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게 이해가 가장 잘 되는 합리적인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사회적인 생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면 늘 그렇듯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때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을 놓쳐서 커다란 위험을 야기하기도 한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본성의 함정

오컴의 면도날과 상반된 개념으로 “히캄의 격언(Hickam’s dictum)”이라는 것이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의사 존 히캄이 했다고 알려진 일종의 조언으로, “환자는 그 증상에 해당되는 모든 질병을 가질 수 있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목이 아픈 환자가 가진 질병은 단순한 감기일 수도, 인후염일 수도, 역류성 식도염일 수도, 혹은 신경학적 문제나 종양과 같은 중병일 수도 있다. 더 간단하게 설명된다고 해서 감기약만 처방했다가 환자의 심각한 질병을 놓칠 수 있기에, 결과적으로 기우로 끝난다 해도, 의사는 환자의 병증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진단에 임해야 한다.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접근하는 것이 이런 경우에는 미덕이 된다.

만약 인간이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려 노력하지 않고, 복잡한 정보를 단순화하는 동물적 본성에만 의존해 왔다면 지구상에 이토록 번성할 수 없었다. 감각의 복잡성 뒤에 숨어,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사례는 생태계 내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복잡한 정보 중에서 생물학적인 인간이 감각하고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을 기술과 도구로 끊임없이 극복해왔고, 그 영역을 극복해내지 못한 수많은 동물종들을 저만치 추월하여 전지구적인 문명을 이룩했다.

더욱이 오컴의 면도날과 같은 우리의 논리적인 본성, 그리고 단순하고 쉬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은, 우리를 진실과 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면도날로 잘라낼 대상은 논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가정들이지, 아직 논리적 의미를 찾지 못한 데이터가 아님에도, 우리는 그럴듯한 명제에 확신이 생기면 그 그림을 망치는 모든 가설에 거침없이 면도날을 들이대곤 한다. 그리고 이런 지점에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쉽게 끼어든다.

ⓒ9gag.com
지혜를 얻는 과정은 복잡하고 그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음모론의 그림은 예쁘고 선명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의적절한 예로 옌리멍(Yan Li-Meng) 박사의 이슈가 있다. 홍콩대 연구원이었던 옌리멍 박사는, 코로나19가 퍼지던 초창기부터 SARS-CoV-2 바이러스의 우한 기원설을 소리 높여 외쳐왔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개발하던 생물학 무기에서 유래했다는 근거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던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고 중국 공안이 그의 집을 수색했다는 소식은, 코로나19 우한 기원설에 더 선명한 색깔을 칠해주었다. 그러다 9월, 옌리멍 박사가 바이러스에 인위적 조작이 개입된 과학적 증거를 폭로하겠다고 밝히자, 국내 언론은 떠들썩하게 이 소식을 속보로 앞다퉈 전해왔다.

하지만 언론의 관심과 달리 옌리멍 박사의 주장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아주 냉랭했다. 바이러스에 대한 염기서열 분석은 이미 바이러스 확산 초창기에 끝났고, 진화적으로 인접한 여러 코로나 바이러스들과의 비교분석 결과로 수많은 자연적 변이들이 발견되었다. 옌리멍 박사의 주장처럼 인위적인 조작으로 판단할 만한 지점은 찾기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동료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옌리멍 박사의 보고서가 우여곡절 끝에 공개되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살펴본 동료 과학자들에게 그의 보고서는 역시나 하는 비웃음을 샀다. 수많은 과학자가 기존의 SARS 바이러스와 어떤 차이점이 있어서 이토록 전파력이 큰 바이러스가 되었는지 골몰하는 동안, 옌리멍 박사는 바이러스 염기서열이라는 복잡한 정보 중에서 자신의 가설에 맞는 정보만 골라 취해서 코로나19 우한 기원설이라는 쉽고 예쁜 그림을 그린 셈이다.

학계에서는 비웃음을 샀을지언정, 한번 대중에게 각인된 음모론의 예쁜 그림을 지워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힘 써야 할 국내의 많은 언론들이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음모론을 확산하는 데에 앞장섰던 사실은, 안타깝고 부끄러움을 넘어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복잡함과 단순함 사이 그 어딘가에서 시급히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이렇듯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신중하게 다각도로 접근하여 분석함이 옳겠지만,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지켜야 할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더욱 그렇다.

시간이 어느새 연말에 다다르고 코로나19에 더하여 유행성 독감으로 인한 이중고가 예정된 이 시점에, 독감백신에 대한 때아닌 공포가 피어오르고 있다. 코로나와 증상이 유사한 독감이 확산될 경우 생겨날 혼란이 너무도 크기에 독감백신 접종에 대한 중요성이 일찍부터 강조되어 왔으나, 백신접종 후 사망한 사례가 예년보다 많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오히려 독감백신 접종을 피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인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백신을 접종한 후 사망했다는 시간적 일치 만으로 사망원인을 백신 부작용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접근 가능한 정보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로 보인다. 상관이 있어 보이는 사건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해내는 일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인과관계가 없음을 명확히 밝히는 일은 더욱 어렵고 힘들다. 백신이 원인이 된 사망인 것인지, 아니면 사망한 사람이 사망 전 백신을 접종한 상황일 뿐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매우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는 꺼트리기 힘들기에, 복잡성을 충분히 풀어내기 전에 불안이 널리 확산함으로써 생겨나는 폐해는 아주 크다. 백신접종 7일 이내 사망자 중 70대 이상 고령자의 비율이 80%가 넘고, 현재까지 보고된 사망 사례들이 학계에 이미 보고돼 있는 백신의 부작용과 증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백신 부작용이 사망원인일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거기에 더하여, 질병관리청에서 역학조사 결과 사망과 예방접종 간의 인과성이 확인되지 않았으니 고위험군에 예방접종을 권한다는 권고를 내놓고 있음에도, 한번 형성된 불안감은 쉬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독감 유행기를 향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우리를 대신해 이 상황을 종합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정부의 대응을 지켜볼 뿐이다. 시간적 제약 속에서 이 문제를 풀어낼 책임자들이 지닌 실력은, 결국 그동안 복잡한 문제들을 단순하게 보지 않고 충분히 어렵게 인식했던 역사가 우리 시스템에 얼마나 축적되었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집단의 결정에 얼마나 신뢰를 보낼 것인지에 대한 개인의 판단은, 마찬가지로 그 개인이 그동안 복잡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느냐에 달려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고 긍정적인 사실은, 지난 시간동안 우리가 코로나19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면서 쌓아온 지혜가, 독감 바이러스가 얽혀 조금 더 어려워질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리란 점이다. 예를 들어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모임을 자제하는 방역수칙은, 코로나19와 독감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해법이니까.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학개념을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려는 노력, 즉 과학이 대중에게 더 재미있고 쉽게 다가가려는 “과학 대중화”의 움직임이 과학계 내에서 오랜 기간 있어왔다. 또한 그런 소중한 노력이 수많은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과학자의 꿈을 심어주는 데에 실로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고 재미있는 과학에 익숙해진 대중마저도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영역에 다다르면 여지없이 쉽게 등을 돌리고, 더 나아가 흥미에만 초점을 맞춘 틀린 정보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유사과학에 이끌리는 것은 과학 대중화로도 어쩔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과학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과학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즉 어려운 진실을 언젠가는 벗겨질 쉬워 보이는 포장지 속에 감출 게 아니라, 어렵고 복잡한 과학지식이 가진 가치와 필요성을 납득시키고, 그 가치에 관심을 가진 대중이 과학적 지식을 정확히 이해해 나갈 수 있도록 차근차근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아무리 힘쓴다 해도, 쉽게 풀어진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대다수가 대중으로서 존재하는 사회는, 언제든 유사과학이 가리키는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 나갈 위험에서 딱히 자유롭지 않다.

한편 과학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복잡성의 장벽이 역설적으로 과학이 그나마 대중적인 신뢰를 받는 전문가의 영역으로 만든다는 점을, 과학자들은 어쩌면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접하는 수많은 세상 소식들을 우리가 논리적 생물학적 본성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개인의 비위에 관한 소식만큼은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 심지어 얼굴도 안 알려진 일반인에 대한 것마저도 논란만 됐다 하면 너도나도 한마디씩 던져대며 순식간에 모든 이슈를 덮어버리는 데에는, 딱히 면밀하게 알아볼 필요도 없이 개인의 도덕적 감각만으로도 잘잘못을 가릴 수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단순화 본성이 틀림없이 작용한다. 총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감내해야 할 복잡성에는 불편한 피로를 느끼며, 오히려 선별된 몇 가지 사실을 재료로 예쁘게 그려진 음모론에 편안한 만족을 느끼는 태도도 물론 마찬가지다. 어려운 정책문제의 복잡한 면면은 내 영역 밖으로 여기며 전문가의 몫으로 넘겨 두면서도, 그 내용을 단순화한 기사 몇 줄만 읽고도 거침없이 정책책임자를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의 익숙한 자세 또한 우리에게 내재된 본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개인이, 사회가, 우리 모두가 그동안 받아온 고통과 손해에 대해서, 이제라도 좀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쉬운 설명을 찾지 못해서 생기는 답답함보다, 어려운 문제를 간단하고 쉬운 것으로 오인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위험이 더 크다는 점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한다. 내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감각만으로 진실이라 여기거나,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틀림으로 치부하는 쉬운 확신이 모여서 진실의 배를 침몰시킨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더 진실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그 복잡한 문제를 면밀히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올바른 해법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급하지 않고 꾸준히 인내해야 할 테다. 이해하기 위해서, 또한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한솔│ 후원회원, 생물학 박사. 들꽃과 새와 벌레에 이끌려 생물학을 시작했으나 돋보기를 너무 가까이 들이댄 나머지 전공분야가 단백질 분자구조 연구에 가 닿았다. 거위가 풀을 뜯는 풍경이 보이는 실험실에서 매일 대장균을 키우며 학위과정을 보냈다. 연구자로서의 호기심과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지니고 탐구를 계속하려 노력 중이다.

01우리는 연결되어야 한다: 생물학자의 눈으로 본 코로나 위기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다. 이전과 조금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나마 꾸준히 연결될 것이다.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닌 전 세계의 수많은 누군가가 만나지 못해도 연결되는 방법을, 바이러스를 파훼하는 방법을 쉼 없이 찾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