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9일 화 / 진실의힘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연출 :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주연 : 울리쉬 뮤흐(비즐러) 마르티나 게덱(크리스타) 바스티안 치(드라이만)

수상 : 밴쿠버영화제, 유럽영화상, 바르샤바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제 등

누군가 나를 몰래 지켜보고 있다면, 내 삶이 철저하게 도청되고 있다면, 이란 가정은 굳이 내가 남다른 범죄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건 곧 사생활의 자유를 포함한 사상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인권침해의 극한이다. 게다가 사생활 영역은 성생활도 포함하기에 곧 포르노적 호기심을 촉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반대세력을 죽여야 유지되는 독재 정권의 역사는 도청의 역사와 맥락을 함께 한다. 그런데 도청은 아니지만, 영화보기에는 스크리 속 인물을 훔쳐보는 인간 본연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포르노성 영화들에선 이런 훔쳐보기 욕망 자체가 카메라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대행하고 있으며, 미스테리나 여타 영화들에서도 화면 밖 존재를 가정한 이중의 훔쳐보기로 영화보기의 은밀하고도 그래서 긴장감 넘치는 시선의 욕망을 내놓고 부추키곤 한다.

그런 문맥에서 보자면 동독정권의 도청을 다룬 <타인의 삶>은 (관음증적 훔쳐보기로서의) 카메라와 (권력용) 훔쳐듣기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나간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훔쳐듣기를 훔쳐보기까지 가세시켜 긴장감을 상승시키면서도 포르노적 욕망에 매몰되지 않은 채, 타인의 삶으로 자신의 삶이 변하는 인간 변신 드라마의 절정을 담담히 은은하게 묘사하는 점에서 탁월하다.

배경은 독일 통일 5년 전, 동독의 서슬 퍼런 보안국 슈타지의 요원 비즐러(울리이 뮈헤)는 비밀요원의 속성 그 차제를 대변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감정이 거세된 차가운 얼굴, 절도 있는 제스쳐와 걸음걸이, 감정이 내비치지 않는 억양으로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방식...당연히 냉혹한 철면피 이간으로 보이는 비즐러는 임무에 충실한 독신이다.

그에게 저명한 극작가 드라이먼(세바스티안 코흐)의 밀착 도청 임무가 주어진다. 체제 충성적으로 드라마를 쓰고 행동하며, 심지어 고위직과 친분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런 완변함 자체가 의심을 받으면서 도청 대상이 된 것. 그러나 그보다 더 진정한 이유는 드라이먼이 동거하는 아리따운 여배우 질란트를 문화부장관이 노리는데다, 그에게 아부해 승진하려는 경찰국장 그루비츠의 야망이 이 도청 업무를 부추킨 것이다.

드라이먼을 도청하면서 비즐러는 점차 그의 고뇌와 솔직함, 동료와 스승에 대한 애정, 특히 연인인 여배우에 대한 사랑에 감염되기 시작한다. 드라이만은 체제비판을 자제하면서도 반체제 인사로 찍혀 무대에서 추방된 스승을 섬기는 인간미와 지조를 보여준다. 역시 체제비판자로 몰려 무대에서 밀려난 동료와의 우정도 지속한다. 물론 연인과의 사랑도 뜨겁게 한다. 적나라한 섹스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이 둘의 사랑이 절절한 만큼 권력의 훼방을 받는다. 권력을 빙자해 그녀와의 성관계를 원하는 문화부장관의 집요한 협박과 유혹, 그걸 알면서도 장관 관련 도청 자료를 삭제하라는 야심가 그루비치의 지시. 이런 상황에서 비밀요원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진 비즐러는 상관에게 저항하고픈 개인적 욕망과 드라이먼에게 전염되어 가는 변화를 겪으면서 거짓 도청자료를 만들기 시작한다. 즉 이제 그는 드라이먼처럼 극작가가 되어 드라이먼의 혐의를 지우는 각본을 쓰는 셈이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비밀요원의 모토대로,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비즐러는 각색에 머물지 않고 밀폐된 도청실을 나와 이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데까지 이르다. 연인을 속이고 문화부장관과 섹스를 하러 호텔로 가기 직전, 질란트는 갈등에 쌓여 바에 들어가 혼자 술을 마신다. 그녀를 미행하다가 바에 들어간 비즐러는 감히 그녀 앞에 나타나 팬을 가장한다. 이제 그는 (도청자료의) 극작가에서 배우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평소에 그녀의 연기를 흠모해 온 팬으로서 그녀에게 여배우의 자존심을 가지라고 격려하며 그녀가 문화부장관에게 가는 길을 막기까지 한다.

비즐러만 변하는게 아니라 드라이먼도 변한다. 존경하는 스승의 자살은 그간 체제 비판을 억제해온 드라이먼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동독에서 벌어지는 예술가 탄압과 인권유린 현장을 고발하는 익명의 글을 서독의 유력한 저널 <슈피겔>에 익명으로 쓰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도청한 비즐러는 이제 그 증거물인 타이프라이터까지 감추는 위험천만한 행위까지도 감행한다. 자신이 속한 조직을 속이는 비즐러의 배신행위에 대해 물증은 없지만 심증을 가진 상관 그루비치는 그를 우편물 감시원으로 좌천시킨다. 그 와중에 드라이머를 잡기 위해 마약혐의로 체포된 질란트는 연인에 대한 배신행위를 하지만 오히려 비즐러는 더욱더 드라이먼의 충실한 수호천사 역할을 감행한다.

통일 후, 드라이먼은 자신의 각색된 도청자료를 찾아보며 경악하게 된다. 믿었던 연인은 배신자였고, 자신을 구원해 준 것은 슈타즈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그는 비즐러를 찾아내 그를 미행하며 훔쳐본다. 그러나 그는 다가가 말을 걸지 못한다.

드라이먼의 책, 진실과 허위가 서로 꼬리를 물며 뒤섞여 뫼비우스띠처럼 꼬인 삶을 써 낸 이야기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제 집집마다 우편물 을 나르는 배달부가 된 비즐러는 우연히 본 드라이먼 책의 광고를 보고 책을 산다. 책 첫 장에 그의 암호명으로 헌정된 이 책을 받아보는 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은 여전히 무표정한 비즐러의 얼굴에 잠시 스치듯이 드러난다. 그는 도청자료를 각색한 혐의로 슈타즈라는 독재권력의 하수인에서 밀려나 한직에 있었기에 통일 후 구제된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해주면서 자신도 결과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상상도 못한 이런 결과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준다.

타인의 삶을 도청하면서 변해버린 한 남자,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보이는 비밀요원의 변모를 깊이 바라보며 따라가는 카메라는 인간 내면까지도 따라 잡는 이야기의 힘을 증명한다. 인간은, 특히 나이 든 인간이란 좀처럼 변하지 않건만, 훔쳐보던 타인의 삶을 이야기화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변형시키는 이 놀라운 변증법은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음울한 이미지로 차분히 펼쳐나가다가 점증적으로 캐릭터의 놀라운 변화를 절묘하게 짜나가는 플로리안 헨켈 폰 도더스마르크의 밀도 깊은 연출, 무표정한 이미지로 비즐러의 영혼의 표정까지 재현해 내는 울리히 뮈헤의 섬세한 연기력이 볼수록 더욱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2007년 미국의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비롯한 유수한 영화제들에서 수상실적이 이 작품의 깊이를 증명해준다.

팁: 누군가를 훔쳐보거나 훔쳐듣는다는 것은 분명 포르노적인 권력의 욕망이며 반인권적이다. 그러나 훔쳐보고 훔쳐 들으며 그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감화를 받는다면, 즉 타인의 삶에 빠져들며 그 타인을 구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는 순간, 그것은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는 인간관계 드라마의 묘미를 보여준다. 세 가지 색 시리즈 중 하나인 키에슬롭스키의 <레드>에서 이웃을 도청하는 늙은 판사, 역시 같은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앞집 여자의 외로움을 훔쳐보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소년, 히치콕의 <이창>에서 훔쳐보기로 발견하는 범죄의 비밀...이 모든 것들은 정면으로만 돌파하지 못하는 숨겨진 인간의 내면과 영혼의 경지를 미묘하게 다루는 점에서 새겨볼 만하다.

2007/03/25

유지나,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