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안기부 대공분실에서 35일간 고문을 당한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이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북촌 재단법인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고문 경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등록 : 2014.03.21 19:48수정 : 2014.03.21 22:06

[토요판] 몸
(21) 고문생존자 강용주의 상처

▶▶ 고문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린 고 김근태 전 의원은 치과에 가길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물고문을 받았던 칠성판과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앉아야 하는 의자가 비슷했기 때문이죠. 고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단의 고통을 줍니다. 상처는 몸이 아닌 마음에 남죠. 1985년 안기부에서 35일간 고문을 당했고, 지금은 현직 의사로 고문생존자들을 치유하는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을 만났습니다.

고문은 인간에게 극단의 고통을 주면서도 여간해서 몸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문에서 폭력만큼 중요한 과정이 상처 은폐이기 때문이다. 과거 안기부의 고문기술자들은 전기고문, 물고문, 폭행, 잠 안 재우기 등 각종 고문을 쉴새없이 하면서도 틈날 때마다 고문한 몸에 연고를 바르게 했다. 특히 안기부 대공분실에서 검찰청으로 옮겨지기 1, 2주 전부터 피멍, 상처 등을 부지런히 지웠다. 이로 인해 법정에서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라고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몸에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고문 행위는 수사의 대상도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고문가해자가 처벌을 받은 경우는 단 한차례뿐이다. 고 김근태씨를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만이 1999년 11월 구속 기소돼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김근태씨에 대한 고문이 국내외적인 관심사가 됐기 때문이다.

고문을 대하는 사법부와 수사기관의 이중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은 다른 증거 없이도 유죄를 확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고문을 받았다”는 진술로는 상처나 골절 등의 증거 없이는 어떠한 조사도 시작되지 않는다. 같은 말이라도 고문을 받으면서 뱉어낸 ‘말’이 더 법적 효력이 있는 셈이다. 최근에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유우성(34)씨의 동생 유가려(27)씨가 “국정원에서 고문을 받아 오빠가 간첩이라고 허위자백했다”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고문 폭행 회유를 통한 허위자백 유도’를 수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

얼굴을 한 명씩 보다가 갑자기
심리적 위압감 끼쳐오는 거예요
아마도 날 고문했던 사람 아닐까
몸의 기억이 반응을 하는 걸까”

현대의학은 고문을 발견하기에,
후유증을 치료하기에 부족하다
고문 후유증은 대개 안 드러난다
출소 뒤 가정의학 전문의가 된
그는 다른 접근 필요하다 말한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좀더 따지고 보면, 고문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문은 한 사람의 온몸과 마음, 전인격을 파괴하는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문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고문생존자이자 현직 의사인 강용주(52)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을 지난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북촌의 재단법인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만났다. 광주트라우마센터는 5·18 광주민주화항쟁 피해자들의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을 치유하기 위한 단체이고,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추렴해 만들어진 곳이다. 강씨는 진실의 힘에서도 ‘이사’를 맡으며 고문생존자들의 ‘치유모임’을 지원하고 있다.

강씨에게 고문에 대한 기억을 묻자,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강씨는 1985년 7월1일 안기부 남산 대공분실로 잡혀왔다.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였다. 강씨는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책자를 선배에게 준 것이 전부”라고 했지만, 참혹한 고문은 그로 하여금 “간첩이다”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고문은 35일간 지속됐고, 8월5일이 돼서야 그는 서울구치소로 갈 수 있었다. 안기부 수사관은 “검찰에 가서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여기서 시키는 대로 얘기해라. 안 그러면 다시 여기로 올 것”이라고 다그쳤다. 검찰청에 가서 혐의를 부인하자 검사는 “너 다시 안기부 다녀올 테냐”고 겁박했다. 안기부란 말만 들어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결국 그는 안기부가 시키는 대로 얘기했고, 재판을 거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비전향 장기수가 됐다. 전향을 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원래 간첩이 아닌데 굳이 내 입으로 ‘간첩이 아니다’라고 전향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14년을 살고 1999년 출소했다. 고문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고, 지금도 남산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그가 고문에 대해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극심한 심리적 외상을 입고 나면 크게 세가지 반응을 보여요. 하나는 과도한 각성이죠.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고 신경질을 내요.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부인이나 자녀들에게 자주 화를 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되죠. 그때 가족들이 ‘우리 아빠 이상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두번째 반응은 재경험이에요. 광주 시민이 도청만 보면 5·18 학살을 연상하거나, 고문받은 사람이 ‘남산’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재경험이죠. 세번째 반응은 회피인데요. 몸이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경험이기에 기억을 무의식으로 밀어넣는 거예요. 이럴 경우 기억을 못 하거나 감정이 무뎌지죠. 저는 주로 세번째에 해당됩니다.”

그는 한 일화를 소개했다.

“제가 1980년 광주에서 시민군이었어요. 그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죠. 도청을 사수하러 갔다가 막판에 총을 버리고 나와 살았다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로 인해 평생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안고 살았죠. 그런데 2년 전에 한 친구가 ‘80년 5월에 우리가 죽어도 시체가 가족들에게 안 갈 수도 있으니, 가지고 있던 물건이랑 머리카락 등을 친구 집 근처의 나무 밑에 묻었다’는 거예요. 시체 없이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고등학생 여러 명이 모여 유품을 정리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신들의 물건을 나무 밑에 묻었다는 거죠. 심지어 그런 일조차 전혀 기억이 없어요.”

“옷 갈아입으라”는 말에 상처받는 이유

그는 토막토막 난 자신의 기억과 고문생존자를 상담한 내용을 토대로 고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고문피해자’가 아닌 ‘고문생존자’라는 용어를 쓰길 권했다.

“피해자는 폭력을 일방적으로 당한 사람이지만, 생존자는 참혹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잖아요. 그래서 객체로서의 피해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생존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문의 시작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에서부터 시작된다. 안기부 수사관이 집에 들이닥쳐 잡혀가는 동안 그는 차 안에서 바깥세상을 볼 수 없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하숙집에 들이닥쳐 ‘야 강용주’라고 부르며 바로 멱살을 잡았어요. 영장을 제시한다든가 미란다 원칙을 고지한다는 것이 전혀 없는 불법체포였죠. 수갑을 채워 차에 타서도 계속 폭행을 했고,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죠. 얼핏 보니까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보였고, 터널을 지나 어떤 수위실을 지나쳤어요. 그리고 어느 건물 뒤편에 내려 지하실로 내려갔죠. 거기가 악명 높은 남산의 안기부 대공분실이었어요. 그 지하실에서 35일간 나오지 못했죠.”

고문의 첫 단계는 ‘옷 벗기’다. 수사관이 “벗어”라고 말하면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도 위압감에 눌려 옷을 하나씩 벗는다. 팬티 한장만 남았을 때 주저하면, 여지없이 욕설과 주먹이 날아온다.

“옷이 우리 몸에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지 그때 처음 알았죠.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와 팬티 한장이라도 입고 있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게 커요.”

안기부에서 “벗어”라는 말은 고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심문을 하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시로 “벗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옷을 벗어야 했고, 정신없이 얻어맞는 일이 반복됐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할 때도 옷을 다 벗긴 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로 인해 고문생존자들은 병원 등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무심한 말에도 상처를 받곤 한다. 낯선 장소에서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강씨는 고문을 ‘국가권력이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 체계적인 행위’라고 정의했다.

“처음 안기부에 잡혀갈 땐, 고문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의지를 다졌죠. 김근태씨의 책 <남영동>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듯, 많은 이들이 처음 잡혀갈 땐 그렇게 의지를 다져요. 하지만 고문은 인간이 육체적, 심리적으로 약한 부분을 계속 공격해요. 굴복할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죠. 영웅적인 사람은 한달간 버티기도 하지만, 오래 버틸수록 후유증이 더 커요. 고문에 굴복하면 그건 ‘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죽음’을 겪어요. 신체적 고통이 사라져도 자기 정체성과 존재가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평생 그 후유증을 안고 살죠.”

고문을 받을 때 몸은 어떤 상태가 될까. 김근태씨는 저서 <남영동>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을 때의 경험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처음엔 칼을 갈면서 견뎠습니다. 숨을 어떻게 몰아쉬고, 또 안 쉬고 또 몰아쉬고 하면서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온 것이었습니다. 주위는 신 냄새 나는 짙은 깜깜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매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으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요.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 버리고 (온몸을 둘러싼)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한마디로 불고문이었습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입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끝까지 쑤셔댈 때마다 어두운 비명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의 각 부분은 해체되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직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비명뿐이었습니다. 몸 전체가 시퍼렇게 핏줄이 솟고 헉헉 꺼이꺼이 목은 쉬어 가는데 이것은 멱이 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습니다.”

고문의 후유증 역시 의학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강씨는 설명했다.

“1980년 진도가족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돼 남편이 사형당하고, 본인은 한 달 넘게 고문을 받은 한화자(71)씨는 안기부에서 수사관에게 구두 뒤축으로 머리를 계속 맞았어요. 한씨는 30년 넘게 수시로 두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병원에선 머리 사진을 찍어봐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죠. 또 어떤 분들은 전기고문을 성기에 받곤 하는데 그 경우에도 발기불능이나 성기능 장애 등을 호소해요. 하지만 그분들도 비뇨기과에 가면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가 나와요. 나는 전기고문을 당하진 않았지만, 성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막대기 등으로 맞는 일은 자주 있었어요. ‘빨갱이 새끼는 씨를 없애야 한다’며 성기를 때리는데 고통도 끔찍하지만 거세될 것 같단 공포도 상당합니다.”

현대의학은 고문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후유증을 진단하고 치료하기에도 부족하다. 하지만 몸의 기억을 간직한 고문생존자들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1999년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전남대 의대에 복학해 10년 만에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강씨는 고문생존자에 대한 의학적인 접근이 다른 이들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짓밟혀 타자화된 몸, 평생 남은 죄책감

“고문의 흔적은 마음에 남아 있고, 고통은 몸이 기억해요. 몸이 아픈 고문생존자들이 병원에서 ‘고통’을 이해를 받지 못하면 이전에 느끼던 ‘고립감’이 더 커지죠. 그렇기 때문에 고문생존자들을 위한 특별한 치유시설이 필요해요. 전세계에서 최초의 고문생존자 치유시설은 197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 생겼어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광주트라우마센터와 진실의 힘도 치유활동을 하고 있지만, 좀더 체계적이고 의학적인 치유를 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합니다.”

기억이 불완전하다고 고통마저 사라지진 않았다. 강씨는 여전히 남산을 두려워한다.

“고문 이후 남산을 딱 두번 찾았어요. 한번은 안기부 대공분실을 보존해야 한다는 취지로 인권단체들과 함께 시위를 갔었고, 다른 한번은 김근태씨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함께 다녀왔어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는데도 심장이 뛰고 불안해졌고, 제가 고문당한 장소를 봤을 땐 눈물이 나오더군요. 저는 사실 고문가해자들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해요. 그런데 간첩으로 조작됐다가 2009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박동운 선생님의 재판 방청석에 안기부 전현직 수사관들이 대거 앉아 있었어요. 재판부에 압력을 넣고, 인권단체들이 방청하지 못하도록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였죠. 그런데 그 사람들의 얼굴을 한명씩 보다가 갑자기 온몸이 벌벌 떨리면서 심리적인 위압감이 확 오는 거예요. 아마도 그들이 날 고문했던 사람이 아닐까, 그게 몸의 기억으로 남아 반응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고문생존자에게 ‘치유’란 어떤 의미일까. 강씨는 ‘타자화된 몸을 다시 내 안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문을 당하면 이미 내 몸이 자기 것이 아니에요. 짓밟히고 부서져 타자화된 몸이 되죠. 몸이 가져오는 고통이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만들고, 이 죄책감은 평생 남아요. 고문생존자들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단, 스스로 고문을 이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타자화된 내 몸을 다시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몸과 나 자신을 다시 통일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내가 내 몸을 사랑해야 하죠. 그리고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안전한 신뢰관계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연대와 애정이 그들을 치유로 이끌 수 있어요.”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93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