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가족
‘조작 간첩’의 딸

1981년 고문으로 조작돼 간첩이 된 아버지는 2009년에 누명이 풀렸습니다. 하지만 무죄가 선고된 재심 법원에는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이미 11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죠.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가족들도 모진 세월을 보냈습니다. 간첩의 딸로서 남몰래 눈물 흘릴 때가 많았죠. 아버지가 무죄가 되고, 더 이상 간첩이 아니라도 지난 시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81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진도가족간첩단’이 발각됐다는 소식이 신문의 첫 면을 장식했다. 기사에는 국가안전기획부가 간첩 일당을 ‘적발’해 ‘일망타진’했다는 무시무시한 표현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기사를 자세히 보니 적발된 간첩이 우리 가족이었다. 사진에 나온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긴 했지만, 분명 아버지와 사촌들이었다. 순간 혼이 나간 듯 멍했다. 가족의 일을 신문에서 보고 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향을 떠나 광주에서 대학에 다니던 나로선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끌려간 이후 어머니는 별 말씀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안기부에 끌려가 한달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면회를 가서 만난 아버지도 예전처럼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공부 열심히 하고, 동생들 잘 돌보라”는 말뿐이었다. 본인들은 모진 고문을 당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자식들에겐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눈을 떠보니 전봇대를 안고 있더라는 엄마

아버지는 결국 징역 7년형을 받았다. 같이 끌려간 친척들도 무기징역 등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국가가 멀쩡한 사람을 데려가 간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학창 시기였던 1960, 70년대는 반공 교육을 철저히 받던 시절이었다. 간첩은 국가를 배신하는 ‘반역자’라고 배웠다. 간첩의 자식들 역시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고, 연좌제로 원하는 곳에 취직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다. 간혹 신문에서 ‘간첩을 잡았다’는 보도가 나올 때, 진위 여부를 의심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간첩이고 내가 ‘간첩의 딸’이라니, 도무지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답답하고 서러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기 어려웠다. ‘빨갱이’와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달 만에 무혐의로 나온 어머니는 생계를 떠안았다. 홀로 농사를 지어가며 여든이 넘은 시아버지를 봉양했고, 육남매를 양육했다. 동생들 학비는 어렵사리 마련했지만, 내 대학 학비가 문제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평소 신세를 졌던 이웃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권했다. 마을에서 부면장이었던 아버지는 평소 이웃들이 어려울 때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곤 했다. 하지만 그 이웃은 내게 “여자가 무슨 공부냐. 고생하는 네 엄마 옆에서 농사일이나 도와라”며 타박을 줬다. 돈을 빌리는 것은 고사하고 크게 상심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그런 말에 절대 귀 기울이지 마라. 어려울수록 더 공부를 해야 한다. 어떻게든 학비를 마련할 테니 하루빨리 학교로 돌아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본인은 늘 구멍 뚫린 속옷을 입고 꽁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자식들 교육만큼은 꼭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어머니는 내 동생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 곧바로 내가 사는 광주로 보냈다. 고향에서 ‘간첩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기가 죽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하루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막내 남동생마저 광주로 올려 보냈다. 친구들 사이에서 ‘간첩의 새끼’라고 놀림을 받은 직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집 앞에서 막내아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두 팔을 벌렸다. 아들을 안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전봇대를 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간첩의 딸’은 결혼도 하기 힘들었다. 대학 때 교제했던 학교 선배와 졸업 이후 서로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잡혀가고서 힘들 때 곁에서 위로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선배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 ‘따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 둘이 만나자 그는 “친한 친구가 경찰이라 네 아버지 얘기를 들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 마라”며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 선배도 집안의 반대를 이기지 못했는지 나와 연락을 끊었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그 이후 ‘아마 평생 결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들도 몇 번 만나면 대뜸 ‘부모님이 무엇을 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감옥에 있다’고 대답을 할 수 없었고, 관계는 그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간첩 일망타진’ 신문기사
자세히 보니 우리 가족과 친척
아버진 모진 고문 받고 7년형
난 이웃은 물론 애인으로부터
버림받고 크나큰 충격 받았다

우연히 만난 그의 프러포즈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각오하고 아버지 얘기 털어놓자
오히려 대견해하며 받아주었다
나는 그 마음 씀씀이에 울었다

평생 결혼 못할지도 몰라…그때 내 손을 잡아준 남자

지금 남편과의 만남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동료 간호사를 소개받기로 돼 있던 한 남자가 내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간호사는 이미 해외로 장기간 파견을 간 이후였다. 우연히 전화를 받은 나는 그 사실을 알렸고, 남자는 “이것도 인연이니 한번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였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그는 호구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도 대화의 소재가 무궁무진했다. 몇 달을 만나고서 그가 프러포즈를 해왔다. 나는 더는 숨길 수 없었다. 헤어질 각오를 하고 그에게 ‘아버지가 간첩으로 잡혀 감옥에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고도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냐”며 오히려 나를 대견해했다. 남편의 마음 씀씀이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우리는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신랑과 함께 아버지가 있는 교도소를 찾았다. 아버지는 “여기 온 것만으로도 된 사람이다”고 결혼을 승낙했다. 운 좋게도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휴가를 받아 결혼식에 참석했다. 짧게 빡빡 민 머리에 죄수복을 입었던 아버지는 어색한 가발을 쓰고 남편의 양복을 빌려 입었다. ‘간첩’ 아버지를 둔 딸이 결혼을 한다는 것도 기적인데, 그 아버지가 결혼식에 와서 내 손을 잡고 입장해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았던 일이다.

1988년, 아버지는 꼬박 7년의 감옥살이를 채우고 출소했다. 나오자마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나는 억울하다. 조작된 간첩이다”라고 무죄를 호소했다. 하루는 서울대 형사법학회에서 아버지를 초청했다. 조작간첩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취지였다. 그 자리에 다녀온 아버지는 한껏 고무돼서 이제야 진실이 밝혀지지 않겠냐며 기대에 부풀었다. 그때 나 사는 게 바쁘다고 아버지 일에 별 관심을 안 가졌던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된다.

몇 년간 서울을 오가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는 바뀌지 않는 현실에 좌절했고, 끝내 병마를 얻었다. 간경화가 악화돼 간암이 발병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청와대 앞에 가서 거적때기라도 깔고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 적도 있다. “무죄가 증명되기 전까진 죽을 수 없다”던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간암에 좋다던 상황버섯을 먹는 등 식이요법과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위해 간에 좋다는 것은 모조리 구했다. 병마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온 지 10년 만인 1998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1년이 지난 2009년, 진도가족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된 이들이 모두 무죄라는 대법원 재심 판결이 나왔다. 무기징역을 받고서 무려 18년간 감옥에 살았던 사촌 오빠도 무죄를 받았다.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가 사건을 조작해 우리 가족을 간첩으로 만든 지 무려 28년 만이었다. 2005년 조직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도가족간첩단 사건을 재조사했다. 그 위원회가 정리한 기록을 통해 아버지가 겪은 일을 자세히 알았다. 거기엔 아버지와 사촌 오빠들이 어떻게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조작됐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떻게 고문을 당했는지를 자식들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기록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고, 터져 나오는 분노와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요즘이 돼서야 고문받았던 경험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후유증이 있는지 그때 맞은 곳이 아프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아직도 못한 말 “아빠, 무죄예요”

스물한살에 겪은 아버지의 사건은 내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감정이 조절되지 않을 때가 꽤 있다. 예전에 방송에서 ‘전두환의 전 재산이 29만원이라 과징금을 납부하지 못한다’는 뉴스를 보고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얼마 전 종합편성채널에서 보도한 ‘5·18 때 간첩이 수백명 암약했다’는 이야기를 직장 동료가 식사자리에서 전해주는데, 그 자리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성격은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직장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소한 것이라도 견딜 수 없다. 동료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흥분하기도 한다. 남편도 내 의사표현이 너무 분명하고 강해서 힘들 때가 있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비슷한 일을 겪은 조작간첩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면 긴 말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막힌 일을 겪은 사람은 우리 가족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뒤 가족들마저 돌아서고, 출옥하고 홀로 남겨진 사람도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도 가족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이전에 하지 못했던 얘기를 서로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상처가 있기에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는 치유자인 셈이다.

요즘도 가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다. 꿈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날 보고서 환하게 웃고 등을 토닥여준다. 그런 아버지께 아직 못한 말이 있다. “아빠, 무죄예요.” 꿈에서라도 그 말을 꼭 하고 싶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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