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간첩이 사형당했더라면?

[기고] '진도간첩단사건' 재심에 관여한 채정원 변호사

12.09.22 16:52l최종 업데이트 12.09.23 23:42l채정원(news)

진도간첩단사건 재심사건에 관여했던 채정원 변호사(법률사무소 윤중)는 이 글에서 왜 자신은 사형제도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한다. [편집자말]저는 범죄에 관한 한 강경론자입니다. 세상이 내일 없어진다 해도 범죄자는 붙잡아 응분의 처벌을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사명이라 믿습니다. 형벌제도는 선량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범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범죄자에게 피해자가 겪은 만큼의 고통을 가하여 그 아픔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교화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전적 응보형 주의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사형제도만큼은 회의적입니다. 범죄를 판단하고 집행하는 인간과 제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서글픈 이유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형벌제도는 유능하고 정상적인 국가기관과 집행자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국가기관과 제도의 집행자가 무능하거나 비정상적인 경우, 형벌제도는 오판이 나오거나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활용됨으로써 범죄보다 더 무서운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오판이나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형벌의 피해자가 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형벌을 받지 않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지만, 특히 생명을 박탈당한 경우는 국가를 원망이라도 하고 망가진 삶을 복구하려 시도해 볼 기회마저 완전히 박탈당하게 됩니다.

지난 2005년 9월 국가보안법 청문회가 끝난 뒤 정혜신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박동운씨.

박동운씨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라디오와 망치뿐인데...

진도가족간첩단 사건의 박동운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그의 재심사건에 관여하게 되면서입니다. 국민을 보호하여야 할 국가가 악마가 되어 빼앗아 가버린 지난 날을 돌이키는 박동운씨는 뜻밖에도 침착하고 담담하였습니다. 듣는 사람도 괴로운 이야기를 하면서 언성을 높이지도 목소리를 떨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험악한 경험과 감옥에서 보낸 긴 세월이 그를 수도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간첩이 아니다"를 반복하는 그의 말은 단호하고 힘찼습니다.

진도에서 농협 직원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던 박동운씨는, 1981년 3월 7일 새벽 느닷없이 들이닥친 안기부 직원들에게 연행되어 남산 취조실로 끌려갔습니다. 범죄 혐의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는 간첩죄였습니다. 그날부터 두 달이 넘는 동안, 박동운씨는 그가 다섯 살이던 6‧25 때 행방불명이 되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로부터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터무니없는 자백을 강요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도 들지 않는 창 없는 밀실에서 밤인지 낮인지 하루인지 이틀인지 시간조차 모르는 채,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몽둥이로 때리고 흔적이 남지 않게 한다고 안티푸라민으로 마사지를 한 후 다시 때리고, 벌거벗긴 채 라이터로 그을리고,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고, 젖은 수건을 덮어 질식하게 하고, 무릎 뒤에 몽둥이를 집어넣고 앉힌 채로 무릎을 밟는 등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24년간 북한을 오가며 고정간첩으로 활동하였다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범죄사실을 자백하는 진술서를,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내용도 모르고 받아 적었습니다. 

이렇게 조작된 진술서를 근거로, 박동운씨의 숙부와 어머니, 동생, 고모 등 일가족 7명이 체포되었고,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입니다. 5공화국 정권이 집권 초기 뒤숭숭한 민심을 반공으로 돌리고자 북한과 어떤 사소한 연결 고리라도 있으면 간첩으로 만든 예는 진도가족간첩단 사건 외에도 수십 여 건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첩혐의로, 박동운씨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확정되었습니다. 검찰이나 법원에서 안기부 수사관의 가혹행위로 인한 허위진술이었다고 하소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술서 외에 범죄를 인정한 증거는 박동운씨가 북한과 교신하는데 사용하였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장 난 라디오 한대와, 간첩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부수어 증거를 인멸하는데 이용하였다는 자루만 남은 망치 하나뿐이었습니다.

박동운씨는 감옥에서 무려 18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가석방되었습니다. 간첩 남편, 간첩 아버지를 부끄러워한 아내와 자녀들은 고향을 떠난 지 오래였고, 박동운씨가 가석방 된 후에도 만나기조차 꺼려하였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박동운씨의 숙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동생, 고모와 고모부도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사형제도 존치론'을 펴고 있다.

국가가 사법제도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풍비박산이 나버린 박동운씨 가족은 인혁당 사건, 최종길 교수사건 등 유사사건들이 과거 확정판결을 뒤집는 무죄의 재심판결을 받은 후, 2009년에야 무죄의 재심판결이 확정되어 오랜 오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청년으로 끌려갔던 박동운씨는 64세 노인이 되어 있었고, 박동운씨의 어머니는 정신을 놓고 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동운씨를 수사했던 안기부 수사관이나, 담당 검사나, 재판관은 이 사건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끔 만약 박동운선생님이 사형을 선고받았더라면,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어쩔 뻔하였을까 정신이 아뜩해집니다. 범죄 피해자들의 심정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릅니다. 많은 범죄 피해자들을 보았고, 그들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한다 생각하였지만, 저 스스로도 범죄를 당해보기까지 가슴 찢기는 그 절절한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그 범죄자가 나를 국민이라 부르고 내가 세금을 내는 조국의 사법제도임에야.

일반인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로 처벌 받습니다. 국민을 보호하여야 할 국가가 사법이라는 제도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어떤 살인마보다 백배 천배 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가장 악한 범죄는 신뢰를 배신하는 것이고, 국가 사법제도의 배신은 수천만 국민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국가를 누가,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요. 

사회가 진보되고 민주화되면 오판이 사라지고 사법제도가 정치의 노리개가 되는 일이 없으리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낙관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언제든 부패하고 망가질 수 있습니다. 범죄자들을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시키는 데 적극 찬성하지만, 범죄자가 국가인 경우 무력할 수밖에 없는 사형제도를 지지하기 불편한 이유입니다. 일부 패륜 파렴치 범죄에만 사형제도를 국한시킨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의 조작이나 오판은 패륜 파렴치 범죄를 빼놓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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