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PD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앞으로 올 사랑>
안녕하세요. 저는 <앞으로 올 사랑>을 지난 12월에 출간한 정혜윤이라고 해요. 책을 내고도 제 책에 대해서 뭐라도 한 줄 써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제 책은 지난 8월의 늦은 여름밤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따라 진행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석 달 만에 집필을 마친 책이네요. 퇴근하고 나서 썼으니까 밤마다 홀린 듯이 빠르게 쓴 책인 셈이에요. 무엇이 저를 홀리게 했을까요? 물론, 코로나와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절박함이었어요. 당시 저는 코로나에 관한 취재를 하던 중이었고 ‘장의 매뉴얼’이란 것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 매뉴얼을 보고 저는 슬픔을 느꼈어요. 제가 속해있는 언론은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코로나 환자의 숫자를 발표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은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죠. 우리의 삶에는 아주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지요? 저는 우리 시대에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산다는 것의 의미,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의 의미,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저 스스로 대답하고 싶어졌어요. 우리에게는 그저 생존한다, 안 죽었으니 산다. 이상의 뭔가가 더 필요하지요? 그즈음 저는 흑사병 시대를 배경으로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을 읽었어요. 데카메론은 대규모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데카메론은 죽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생기 넘치는 책이었어요. 주로 사랑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그 사랑이야기는 현실에 있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올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어요. 아직은 거의 보이지 않는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곧 인류 역사에 나타날 사랑요. 저는 이 글의 미래 지향성에 마음이 끌렸어요. 데카메론의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돼요.
첫째 날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 둘째 날 달콤한 결실을 맺는 이야기, 셋째 날 원하는 것을 얻는 이야기, 넷째 날 불행한 사랑 이야기, 다섯째 날 행복한 사랑 이야기, 그리고 통찰력 있는 이야기. 재미난 이야기. 아주 커다란 모험을 떠난 이야기...
이 열흘 밤의 주제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나는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지? 어떤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지? 인생에 무엇을 얻고 싶어 하지? 무엇을 행복이라고 혹은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무엇을 사랑으로 간주하지? 내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이지?
그러니까 저는 코로나와 기후위기를 배경으로 이 질문들에 답을 한 책을 썼다고 볼 수 있어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코로나와 기후위기는 마치 하늘이 우리의 배경인 것처럼 우리의 현실입니다. 책을 쓰는 마음은 초조했어요. 코로나와 기후위기에도 맞고 열 가지 주제에도 맞고 미래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도 되는 이야기를 내가 써볼 수 있을까? 너무 긴장되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어요. 사실 저도 이런 책은 처음 써보는 셈이에요. 자유롭게 주제를 정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주제를 부여받았으니 꼭 어떤 도전에 응하는 기분마저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제가 이 책을 쓴 것을 어느 정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 자신을 미래를 위해 한번 던져본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저는 제가 이 주제들을 가지고 씨름한 시간들을 단 일 분도 후회하지 않는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행동이 미래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할 때 더 행복합니다. 이 글은 이야기와 삶을 엮는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우선 저는 이야기의 힘을 믿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빛이 난다면, 그 이야기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고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을 잡게 도와줘요. 늘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면 그냥 지금 이대로 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삶이 가능할지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가장 공들여 쓴 장은 셋째 날 원하는 것을 얻는 이야기, 넷째 날 불행한 사랑 이야기, 다섯째 날 행복한 사랑 이야기, 아홉째 날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 등입니다. 이 이야기 안에는 우리가 지금 느끼는 지구파괴에 대한 양심의 가책, 찜찜함과 떳떳함, 후회 없는 삶,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이야기, 백신 만능주의에 대한 경계, 양극화 등 장차 나타날 우려가 있는 더 차가운 야만적 세상, 순응과 저항, 주체적인 삶, 살아있는 말, 사랑과 부동산의 마법, 공장식 축산과 인간 본성을 비롯한 많은 중요한 당대적 주제들이 펼쳐집니다. 각 시대는 자기 시대만의 이야기를 필요로 합니다.
제 작은 바람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앞에서 소개한 열 가지 주제에 따라 각자 생각을 정리하거나 글을 한편씩 써보는 거예요. 글을 쓸 때 추구하는 것은 인생에서 추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종이는 신비로운 공간이에요. 종이에 적어놓는 순간 우리의 오류, 실수, 후회, 희망은 또 하나의 시간을 갖게 돼요. 미래라는 시간이에요. 그 적어놓은 이야기가 좋은 것이라면, 진실된 마음이 움직여서 쓴 것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깃들어 살게 돼요.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요. 이야기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기도 해요. (피난처는 아홉 번째 날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를 혼자 있게 하지 않으니까요. 늘 우리와 같이 있으니까요. 저는 제 생각대로 썼지만 다른 분들은 또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참을 수 없이 궁금합니다. 그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탐구일 테니까요.
저는 이 글을 쓰는 동안 기다릴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의 삶이 최종적인 의미를 갖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요. 그 일을 위해 저 자신의 삶의 시간과 에너지를 쓸 것을 조금 더 믿게 되었어요.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겠지요? 우리에게는 지금 더 힘이 필요하지요? 힘의 비밀은 연결입니다. 이렇게 분리가 심할 때는 더욱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지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잘 연결될 때 힘을 더 낼 수 있어요. 더 열정적으로 살 수 있어요. 그 연결은 이제 인간과 인간의 연결을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과의 연결까지 확장되어야만 해요. 더 크고 좋은 연결에 마음을 열 때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요? 우리가 힘을 내는 방식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 것인가? 보다 더 오래된 질문이 있을까요? 거기에 수많은 창의적인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삶은 여전히 축복이고 시간은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