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숙,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님 아내│
지난 화요일 동수 씨는 작은딸과 한라산을 다녀왔다. 요즘 운동도 안 하고 체력도 떨어져 한라산을 다녀오기에는 무리인 것 같은데, 대구에서 병원 근무하는 작은딸이 아빠랑 가을 한라산을 꼭 가야겠다고 하니 두말 말고 따라나섰다. 동수 씨의 이런 모습은 하나도 낯설지 않다. 딸들이 원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결해주는 아빠, 그것이 아빠라는 존재가 된 후 한 번도 변하지 않고 보여준 동수 씨 모습이다.
딸들의 이름도 뚝딱 지어낸 동수 씨는 여러모로 딸바보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들이 어릴 때 콧물을 많이 흘리면 동수 씨는 입으로 애들 코를 빨아주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시어머니는 당신은 어머니라도 자식들 코를 빨아 주면서 키워보지 않았는데 참 대단하다고 하셨다. 나는 아이들이 먹다가 남긴 밥은 먹지 않고 치우지만 동수 씨는 그 밥도 뚝딱 해치운다. 아빠라는 이름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이다.
본인이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아보지 않아서 딸들에게 더욱 그러는 것 같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준다는데 꼭 그 말이 맞는 것 같지는 않다. 딸들이 초등학교 때는 육상코치를 자처해 처음 종합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둬 그해 학교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그때 동수 씨에게 운동을 배웠던 딸 친구들은 지금도 동수 씨에게 코치님이라고 부르고, 그때처럼 운동을 재미있게 해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동수 씨는 노래를 잘 부른다. 그렇다 해도 보통의 아빠들은 가족동요제에 나가자고 하면 창피하니 안 하겠다고 한다. 게다가 귀여운 율동까지 곁들이는 것은 더욱 질겁할 것이다. 그런데도 동수 씨는 제일 열심히 했고, 그 덕에 제주도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큰딸이 6학년 때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합창단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집과 연습실 거리가 굉장히 멀었지만 동수 씨는 딸이 하고 싶다니까 장사하고 배달하고 바쁜 시간임에도 매주 토요일마다 1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데려다줬다. 딸들에게 공부하라고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작은딸이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해서 나는 시험에서 평균 몇 점을 맞으면 사주겠다고 했다가 동수 씨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사줄 거면 그냥 깔끔하게 사주지 왜 조건을 다느냐고. 그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아이들에게 조건을 달고 무언가를 사 준 적이 없다.
그랬기에 딸들은 유독 아빠를 좋아하고 따랐다. 동수 씨가 화물차 기사를 할 때 작은딸은 시험만 끝나면 체험학습을 써서 아빠를 따라 육지를 다니곤 했다. 담임 선생님이 시험만 끝나면 또 아빠 따라 육지 갈 거냐고 할 정도였다. 다른 화물차 기사들은 그런 동수 씨를 보며 부럽다고도 많이 했다. 오죽하면 작은딸은 세월호 참사 후 제일 안 좋은 것이 아빠 따라 육지를 못 가는 것이라고 했겠는가.
하지만 지금 동수 씨에게 그런 딸바보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딸들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남동생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빠의 기분을 제일 먼저 살피는 것도 딸들의 몫이다. 큰딸은 아빠가 우울해보이면 좋은 공연이나 박람회, 영화 등을 수시로 찾아서 데리고 간다. 며칠 전에는 마트에서 참치를 파는데 일반 회보다 3배 정도는 비싸 보이는데도 아빠가 좋아하니까 무조건 사가자고 했다. 게다가 아빠를 웃게 만든다고 로또를 사서 참치회 포장 밑에 숨겨두기도 했다. 물론 서프라이즈는 성공했다. 대구에 있는 작은딸은 아빠에게 매일 전화한다. 물론 나에게도 전화하지만 본인이 필요할 때만 한다.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싱거운 아빠이지만 아빠의 목소리를 들어야 안심이 된다고 한다. 지난달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최신형 운동화도 사서 보냈다. 딸들은 아빠가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매일 연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동수 씨는 너무도 심할 정도로 인터넷에서 물건을 마구 구입했다. 올 초 고대안산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감염 위험으로 택배로 물건을 주문하지 말라는 데도 계속 병실로 주문을 해서 간호사들에게 여러 번 주의를 받기도 했다. 물건을 사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문제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계속 사는 것이었다. 비슷한 것들을 여러 번 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이즈도 맞지 않은 엉뚱한 것들을 사기도 했다. 너무 심해지자 나는 동수 씨에게 짜증을 자주 냈다. 하지만 딸들은 그것도 아빠가 심리적 욕구 불만에서 올 수 있는 거라며 나를 설득했다. 아빠가 잘못 산 것들을 반품시키는 것도 큰딸이 해결한다. 어떤 때는 어디에서 주문했는지조차 몰라 애를 먹었다. 마트에 가면 카트 안에 이것저것을 막 담기도 한다. 어김없이 나는 짜증이 나는데 딸들은 아빠에게 이것은 왜 필요한지 설명을 하게 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빠 몰래 살짝 빼놓는다.
가끔은 그런 딸들의 모습이 짠하기도 했다. 예전에 차를 운전하다가 전혀 화낼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딸들에게 불쑥 화를 낸 일이 있었다. 나도 순간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딸들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빠에게는 안 그런 척 이야기를 하는 데 정말 속상했다. 딸들이 아빠에게 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남동생에게 하는 것이다. 참는 것만 배우는 것 같은 딸들은 누구에게 위로를 받으려나.
언젠가 동수 씨가 너무 분노를 표출하는 등 감정적으로 힘들게 해서 아빠가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더니 딸들은 아빠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아빠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한 말이 늘 가슴에 남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보다 더 나쁜 일들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위로의 말들을 해줬다. 물론 그 이후로도 우리에게 나쁜 일들은 더 일어났지만 말이다.
돌아보면 그래도 지금까지 아빠 곁에서 좋은 지지자가 되어 주는 건 어릴 때부터 좋은 딸바보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동수 씨의 지독한 내리사랑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아빠는 소중한 생명을 구한 우리들의 영원한 히어로라는 닉네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딸들의 치사랑도 함께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