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지나 여름이 가까워졌지만 농성장의 혹독했던 추운 겨울이 가끔 생각난다. 나는 겨울 아침이면 일어나자마자 잠이 덜 깬 상태로 따뜻한 커피 한잔을 타서 언 몸을 녹였다. 천막을 열고 나가면 매일 같은 자리에서 농성하는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다. 짧은 묵례로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문득 2013년 겨울이 떠올랐다. 그땐 우리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단체가 없던 시기라 혼자 추위와 싸웠다. 농성을 하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온 단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나 음료를 마셨고, 누구 하나 따뜻한 커피나 음료 한잔 마셔보라고 나에게 권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추운 날 2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들고 와 “힘내세요. 아직 제가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며 내 손에 캔커피를 쥐여주고 갔었고. 나는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두손으로 바로 받았다. 그 캔커피는 너무나 따뜻해 다 식을 때까지 먹질 못했다. 따뜻한 캔커피의 온기는 거리의 냉혹한 추위에 나를 보호해줬고 전혀 모르는 분의 응원 메시지를 생전 처음 받아봐서인지 바로 마시지를 못했다. 그건 단순한 감사함이나 고마움을 넘어서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농성장에서 나는 휴대용 버너를 켜서 작은 주전자에 물을 끓인 후 종이컵에 물을 붓고 일회용 커피믹스를 부어 따뜻한 커피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여러 잔의 커피를 들고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잔씩 돌리고 그다음엔 전혀 모르는 1인시위 하시는 사람들에게 한잔씩 나눠줬다. 커피를 받으신 분들은 잠깐 놀란 표정과 함께 금세 웃으며 고맙다는 듯 묵례를 하며 커피를 받았고 맛있게 마셨다.
나에게만 커피를 권하지 않던 상황을 겪어 보았기에 그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2013년 겨울, 내게 커피를 권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미웠다기보다는 저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외로웠다. 그 외로움을 알기에 나도 얼굴을 처음 본 1인농성자들에게도 모두 커피를 준 것이었다. 참고로 나에게 캔커피를 쥐어준 그 여성은 대학을 졸업한 후 기자가 되었고. 2014년 형제복지원사건을 기사화해서 기사로 세상에 내보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주었다.
농성장은 오로지 기다림의 장소이면서도 한편 서로가 위로를 주고 받는 장소가 되었다. 1인농성을 하는 사람들 중에 사회적 가족이 된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왔고. 나를 위로하겠다며 다가왔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농성장에 찾아와 듣고 울기도 하고 때론 웃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를 찾아온 이들에게도 말 못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과거의 고통, 절망, 분노만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좌절, 고통을 들여다봤다. 과거의 나는 그저 위로와 동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내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