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숙,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님 아내│

6년 전 2015년 3월 19일은 동수 씨가 첫 자해를 한 날이다. 우연히 며칠 전에 그때 살던 집을 다녀왔다. 그날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름 우리에게 좋은 추억이 많은 집이었다. 반지하에 종일 햇빛 한 번 들어오지 않아서 낮에도 전등을 켜야만 지낼 수 있지만 우리 가족 모두 그 집에 사는 것이 좋았다. 마당이 습해서 벌레들이 거실에서 같이 살고 2층 주인집이 학교 후배라 불편함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꿈을 키우고 있었다. 화물 기사를 하던 동수 씨의 화물차 할부금이 끝나면 전셋집이라도 마련해야겠다는 야무진 꿈 말이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동수 씨는 다른 화물 기사보다도 몇 배는 더 열심히 일했다. 어떤 달은 집에서 딱 하루 잔 날도 있었다. 아침에 육지에서 배를 타고 들어오면 물건을 내리고 또 물건을 싣고, 바로 저녁 배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내가 부두에 갈아입을 옷을 갖다주고 빨랫감을 받아오곤 했다. 그 잠깐 사이 부두 앞 식당에서 둘이서 먹던 짜글이 김치찌개는 우리만의 추억으로 남았다. 무슨 일이든 성실하고 꼼꼼하게 처리하는 동수 씨에게 고정적으로 물건을 주는 업체들도 많았다. 미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계산적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도 못하고 정직 하나로 일을 했던 동수 씨에게 화물 기사는 천직인 것 같았다.

나는 낮에는 지역아동센터를 다니고 저녁에는 독서 논술을 가르쳤다. 부지런히 화물 기사 일을 하는 남편을 보며 나까지 경제적으로 좀 더 보태면 금방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 것 같았기에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수업받는 친구들은 우리 집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자기들 집보다 좁고 허름한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는 그들을 반기는 토끼 두 마리가 있었고 지지배배 지저귀는 제비들이 있었기에 수업에 들어가기 전 교감을 꼭 했다. 어떤 날은 한 친구가 아빠랑 밭에 가서 토끼풀을 뜯어 와서 주기도 했다. 조금 미안했던 점은 아토피가 심해서 자기 집에는 편백으로 인테리어를 했다는 친구였는데 우리 집에 와서 수업할 때면 “선생님, 선생님 집에만 오면 눈이 따갑고 아파요”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선생님 집이 습해서 그렇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토요일에는 센터(독서논술 제주지부)에 가서 온종일 수업을 했고 일요일에도 일찍 집에서 수업하고 교회에 가곤 했다. 그렇게 나만 열심히 하면 우리들이 꿈꾸는 것이 손안에 금방 들어올 것만 같았다.

동수 씨에게 트라우마가 금방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도 얼마 동안은 혼자 팽목항도 가고 안산도 가고 단원고도 찾아갔다. 보상 문제로 국회를 가는 등 열심히 생활했다. 그랬기에 트라우마는 그 단어만큼이나 내 생활에서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6년 전 그날이 트라우마의 시초였다.

김형숙
좁고 낡은 공간이었지만 독서 논술 학생들은 우리 집에서 수업하기를 참 좋아했다.
김동수
학생들이 우리 집 오길 좋아했던 이유 중에 토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날은 우리 집이 아닌 학생 집에서 독서 수업을 했다. 집에 차가 한 대뿐이라, 동수 씨에게 수업 마치는 시간인 저녁 7시 20분까지 학생 집 앞으로 마중을 나와 달라고 했다. 끝나면 또 다른 집으로 수업하러 가야 했다. 동수 씨와 살면서 한 번도 나보다 늦게 일어나거나, 마중나와 달라는 부탁에 늦은 적이 없었다. 항상 제시간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사람이 그날은 나와 있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선생님 차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안 보인다고 했다. 혹시 잠이 들었나 싶어 동수 씨에게 전화했지만 계속 받지 않아 큰딸에게 전화했다. 자기 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큰딸은 아빠가 안방에 있을 거라고 했다. 얼른 아빠에게 엄마 데리러 오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큰딸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빠가 화장실에서 커터 칼로 손목을 긋고 피를 흘리며 앉아 있다고 했다. 얼른 119를 부르고 지혈하고 있으라 해놓고는 집까지 뛰어갔다. 내 가방에는 그날따라 학부모가 먹으라고 준 감자가 있었고 1km 되는 거리를 무슨 정신으로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딸이 응급구조학과를 나왔기에 당연히 응급처치를 했다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하며 갔다. 하지만 집에 들어서자 딸은 몸을 벌벌 떨며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동수 씨는 피를 흘리며 앉아 있었고 의식은 희미했다. 구조대원과 경찰이 와서 동수 씨 상태를 확인하고 구급차에 태웠다. 나는 동수 씨를 따라 구급차를 타고 가느라 혼자 남아 있을 큰딸 생각은 못했다. 큰딸은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오는 고등학생인 동생 걱정에 집에 남겠다고 했다. 뒤늦게 집에 와서 놀랄 동생 걱정에 큰딸은 아빠가 남긴 처참한 흔적을 다 치웠다.

그날의 사건은 그 집에서 나와야 하는 계기가 됐다. 큰딸은 자신이 응급구조사임에도 아빠를 응급처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그날 일이 자꾸 떠올라서 혼자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낮이건 밤이건 꼭 누군가 같이 가야만 했다. 동수 씨는 병원에 입원했고, 병원과 학교가 가까웠던 작은 딸은 나와 함께 병원 1인실에서 생활했다. 잠잘 공간이 없어서 큰딸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지냈다. 어느 날 새벽쯤 병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에 전화벨이 울렸다. 큰딸이었다. 집에 누가 들어온 것 같다며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당시 살던 집은 가스 배관이 연결된 창문은 잠글 수가 없어서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다. 병원에서 집까지 거리가 멀어 당장 가 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친정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좀 가보라고 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딸의 마음 상태가 그랬기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큰딸은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사정을 들은 교회 장로님이 본인 건물에 있는 살림도 가능한 학원 공간을 내주셔서 이사했다.

트라우마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낳고, 가족들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3월로 들어서자 동수 씨는 다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수면 시간도 더 줄어들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낸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동수 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숲길에 오는 사람들이 조금만 떠들거나 음악 소리만 크게 틀어도 신경이 예민해졌다. 동수 씨는 그냥 두라고 하는 데도 꼭 가서 주의를 주는 내 모습을 본다. 운전하는 동수 씨 옆에 앉아 있다 보면 동수 씨가 다른 운전자들과 시비가 붙어 싸울 것만 같고 어떨 때는 상대 운전자를 향해 내가 먼저 욕을 하기도 한다. 대구에 있는 작은 딸은 어쩌다 우리가 전화를 못 받으면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을 하고 시댁과 친정의 형제들도 내가 전화를 하면 또 동수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내가 먼저 전화를 할 때는 애써 밝은 톤으로 이야기를 한다. 큰딸은 그토록 심장을 뛰게 했던 소방관 직업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많이 느끼고 있다. 아빠의 일로 본의 아니게 경험했던 구급차와 응급실 생활에 두려움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작은딸은 자해하고 오는 환자를 보면 힘들다고 했다. 나 역시 언제부터인가 구급차를 탈 상황과 응급실에 갈 상황이 생기면 피하고 싶어진다. 누군가 대신 가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김형숙
얼마 전에 동수 씨가 첫 자해했던 반지하 집을 다녀왔다. 다시는 그런 악몽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기에 우리 가족은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를 외롭게 하지 말고, 무조건 아빠 편에 서자고.

우리 집 세 여자의 생일이 있는 찬란했던 봄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아픈 날을 기억해주고 함께 해주는 날이기에 의미 있다고도 하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영원히 달력에서 지우고 싶은 4월 16일이다. 예전에는 그날만 외국에 나가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동수 씨는 오늘 사우나를 갔다가 또 머리를 빡빡 밀고 왔다. 한동안 자르지 않고 잘 기르더니 오랜만에 머리를 밀었다. 동수 씨가 머리를 미는 데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간 겪었던 상황으로 잘 안다. 동수 씨는 머리카락이 머리를 찔러대니 아파서 밀었다고 하는데 그건 머리카락이 원인이 아니라 동수 씨 마음의 고통 때문이다.

지난 1년여 간의 코로나19 상황을 보면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는다. 눈에 보이는 태풍, 지진과 해일 같은 재해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3차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닌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 사람들을 꽁꽁 묶어놓고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트라우마도 똑같다. 외형적으로는 멀쩡하고 건강하게 보이지만 어떤 불치병만큼 본인과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이기에 진단도 힘들고 치유도 어렵다. 세월호 의상자 선정을 받을 때도 힘들었다. 의상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행위를 하다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선정된다. 구조행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화상을 입은 등 외상이 남은 사람들은 빠르게 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동수 씨는 정신적 트라우마 외 특별한 외상이 없었고, 지금까지 트라우마는 의상자로서 인정한 적 없다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한 서류 준비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15년 7월에 겨우 의상자로 인정받았지만 등급은 높지 않았다. 등급을 높여달라고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보건복지부 담당자는 트라우마로 의상자로 인정받은 것도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많은 전문가의 연구 끝에 코로나19 백신이 나왔듯, 우리 가족이 겪은 일들이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트라우마에 좋은 치료제가 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그 치료제는 이미 우리 곁에 있는데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사자인 우리가 못 찾고 있다면 우리를 응원하고 함께 하는 분들이라도 찾아줬으면 좋겠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앞두다 보니 두서없이 하고 싶은 말만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