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림 역사문제연구소│
동력은 곧 권력을 갖는다. 석탄을 태워 움직이는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화석연료가 제공하는 폭발적 에너지 공급량에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티머시 미첼은 탄소민주주의(생각비행, 2017)를 통해 화석연료 사용과 민주주의의 관련성을 탁월하게 짚어낸다. 그에 따르면 화석연료, 즉 석탄을 대규모로 사용하게 되면서 탄광 인근에 산업화 지역이 형성되고 생산지와 도시는 서로 철도로 연결된다. 이렇게 구성된 ‘철도 네트워크’에 연관된 수많은 노동자들은 석탄 공급의 속도와 양을 조율하는 힘을 가짐으로써 정치적 주체로 변모하고, 그중에서도 광부는 중심에 있었다. 파업으로 에너지의 흐름과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는 힘, 티머시는 그 힘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주요 에너지원이 석유로 이동하게 되면서 이러한 네트워크는 힘을 잃게 된다. 석탄을 채굴하고 운송하는 과정에 얽혀 힘을 발휘하는 노동자들이 ‘송유관’으로 대체되어 버린 것이다. 송유관이라는 ‘이동성’은 노동자들의 힘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전 세계적 유전 개발의 붐을 일으키고, 유전 개발은 석유 기업과 정부의 ‘제국적 이익’에 맞물려 광범위한 통제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석유가 곧 권력이 되고 전쟁무기로 전화되던 1970년대, 한국에서도 유전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6년 포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전국이 열광했던 에피소드도 있지 않은가. 석유를 주 에너지원으로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한국이 경제성장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은 역시나 석탄이었다.
울산정유공장 가동 후 중공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위해 주유종탄을 지향하던 박정희 정권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주탄종유 정책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주요 에너지원은 석탄에서 석유로 이미 전환되었고, 도시가스 개발 역시 시도되고 있었다. 반면 석탄 매장량은 고갈되고 있었기에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석탄이 땅속의 다이아몬드라면, 석유는 흘러넘치는 다이아몬드였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탄광노조의 강력한 반발에도 결국 석탄산업의 축소에 성공했다. 1974년 25만 명이었던 영국의 광부들은 20여 년간 4천여 명의 수준으로 계속 줄어들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기 전미국광산노동조합(UMW)의 대규모 파업이 있었지만 석유로의 전환을 막을 수는 없었고, 호주의 주요 석탄지역인 울런공 역시 1980년대부터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1980년대 탄광의 대규모 구조조정과 사양화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적 흐름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86년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이 시작되며 탄광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2004년, 한국의 최대 민영탄광인 동원탄좌의 폐광을 마지막으로 강원도에는 석공 산하의 두 개 광업소만이 남았다. 경제성장기 ‘산업전사’로 호명되며 생산성의 향상을 강요받았던 광부들은 그렇게 일자리를 잃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호황기를 겪은 탄광촌은 산업의 흥망성쇠에 따른 ‘느린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사라졌다.
‘느린 폭력’이라는 개념은 롭 닉슨이 주창한 것으로(느린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에코리브로, 2020),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폭력은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당장은 고통받지 않는다. 폭력의 구조에서 약한 고리에 있는 최약체에게만 서서히, 켜켜이 쌓여갈 뿐이다. 롭 닉슨이 지적하는 것처럼 ‘버림받는 가난한 공동체’들이 당하는 느린 폭력은 조용히 묻힌다. 폭력은 “피를 흘려야 주목받”기 때문이다. 1980년 사북항쟁은 이런 느린 폭력이 진행되는 사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주목받았던 사건이었다.
앞서 티머시 미첼이 말한 석탄과 민주주의의 관련성을 다시 떠올려보자. 1980년 사북항쟁이 발발한 후, 전두환 정권은 빠른 수습과 정부 지원을 약속하고 실제로 목욕탕과 복지회관 등 가시적인 복지를 제공했다. 물론 그러한 가시적 복지 뒤에는 사북항쟁 참여자들에 대한 고문이라는 직접적 폭력 역시 존재했다. 그럼에도 사북항쟁이 발발한 후 전두환 정권이 ‘복지’를 약속하고 그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티머시가 말한 것처럼 광부가 갖는 민주주의적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탄산업의 사양화와 독재 정권의 억압에도 광산지역이 개발되도록 압박했던 사북항쟁의 힘은 석유로의 전환이라는 ‘느린 폭력’에 대한 대항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또한 사북항쟁의 동력을 계승한 1995년의 ‘3.3투쟁’은 탄광 지역의 황폐화에 맞서 폐특법(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을 이끌어 냈다. 첩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강원도의 작은 지역에서 어떻게 이러한 힘이 나오는 것일까. 사북이라는 지역의 시작과 함께한 탄광촌이 갖는 공동체적 성격, 연대성을 다시금 살펴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 세계는 석유에서 이제 전기로, AI를 활용한 초연결·초지능의 시대로 내달리고 있다. 가솔린을 대체할 전기차는 이미 상용화되었고 자율주행시스템 역시 곧 완성될 테다. 손 하나 꿈쩍이지 않고 말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이미 도래했다. 이러한 전환 속에 우리는 ‘느린 폭력’의 징후를 계속 감지하면서도 이것이 폭력이라 느끼지 못한다. 키오스크 앞에서 주저하는 노인, AI와 AR의 기술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지만 여전히 집 문 바깥으로는 나가기 어려운 장애인. 완전 자율주행이 도래하는 때, 그 필요를 잃게 될 화물 운송 인력들.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될 때 탄광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면 4차산업혁명 앞에서는 더 광범위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와 필요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느린 폭력’은 이미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1980년 사북항쟁의 동력이 이 거대한 흐름 앞에 선 ‘가난한 공동체’인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김세림│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 사북팀에 소속되어 2017년부터 사북항쟁 참여자들의 구술증언 수집 및 탄광 지역 자료수집을 함께 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사북사건 이후의 사북: ‘복지’라는 외피를 쓴 일상적 감시」(역사문제연구 42, 2019)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