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시에 쌓인 분 풀고 죽을라니께 청와대 델따 주소

2016.12.4. 한겨레신문 토요판

이문영 기자

“취토(取土)요.”

어린 손자가 지관의 말을 따라하며 흙을 뿌렸다.

한등자(76)가 땅에 들었다. 겨울을 맞는 지막리(전남 진도군)의 흙이 아직은 포근했다. 땅에 깃든 할머니에게 손자가 땅을 딛고 인사했다.

(중략)

“그것은 난(亂)이었제. 난이었당께.”(한등자 생전 구술)

박영준은 박화룡(1990년 11월 사망)의 아들이었다. 박화룡은 아들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1950년 9월27일)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난 만나서 그리되야 부렀제. 그 징헌 난을 만나 갖고 말이시.”

박영준은 이수례의 남편이었다. 이수례는 “공장(서울 이수례 친정 쪽 회사) 좀 보고 오겠다”고 나간 남편의 소식이 끊긴 뒤 어린 아들 셋(5살·3살·7개월)을 데리고 진도로 피란했다.
(중략)
가족들이 한등자의 무덤을 돌며 손으로 쓸었다. 무덤에 작별을 고하는 가족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땅에 놓인 영정(사망 4개월 전 촬영) 안에서 한등자가 바라봤다. 주름진 입매엔 임종 전 뱉지 못한 언어가 맺혀 있는 듯했다.

“죽도록 악을 써야제. 우리가 돈 타갖고 잘산다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대. 기가 멕히제. 생각만 혀도 가슴이 두방이질 친당께. 창시(창자)에 쌓인 분 풀고서 죽을라니께, 나 청와대 좀 델따 주소.”(생전 구술)

묘소 앞 탁 트인 벌포바다(고군면 지막리) 위로 햇빛이 자글자글 끓었다.

기사전문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