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윈틴은 버마(미얀마)의 대표적 양심수다. 랑군대학을 졸업한 뒤 언론사 기자로 일하던 그는 1988년 ‘88항쟁’ 당시 언론연맹 부위원장으로 항쟁에 적극 참여했고 아웅산 수치와 함께 민족민주연맹(NLD)을 창립했다. 1989년 체포된 뒤 수차례 추가 형을 받으며 모두 19년2개월을 복역했다. 2008년 9월 풀려나 사망할 때까지 감옥에서 입었던 수의를 입고 살았다. ‘한타와디 우윈틴재단’을 설립해 고문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재활과 치유를 이끌었다. 재단법인 진실의힘은 유엔이 정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6월26일)을 맞아 ‘제4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우윈틴과 한타와디 우윈틴재단에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박동운 진실의힘 이사장이 두 달 전 타계(4월21일)한 우윈틴의 삶과 죽음을 기리며 <한겨레21>에 조사를 써보냈다. 박 이사장은 1981년 3월 조작간첩 사건(진도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일가족 7명과 함께 국가안전기획부에 불법 연행돼 68일 동안 고문수사(무기징역 선고 뒤 17년5개월 만인 1998년 출소)를 받았다. _편집자

존경하는 우윈틴 선생님.

저는 ‘진도’라는 한국의 남쪽 끄트머리 섬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봄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밤새 즐거워하던 고등학생들을 태운 세월호가 이곳 앞바다에 무겁게 잠겨 있습니다. 두 달이 훌쩍 지난 지금도 아들딸을 찾지 못한 부모들의 피울음은 그치지 않고 있지요. 차마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고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지켜볼 뿐입니다.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린 탓에 제가 벌을 키우고 있는 산에 가질 못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뒤 ‘간첩’이라 따돌리던 사람들과 섞여 살기 어려웠던 저는 작은 절에서 양봉을 하시던 어머니를 따라 양봉을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역시 4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지만 저와 같은 이유로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깊은 산속 절로 들어가셨지요. 그렇게 시작한 양봉인데 꿀벌들과 함께 사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고 재미있습니다. 그들한테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면서 저 역시 사람들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까요.

군용견 사육 시설에 갇혀

저는 지금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습니다. 푸른 수의를 입고 검은 안경을 쓴 채 말을 건네는 듯한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내력을 전해듣고 한번 뵙기를 고대했는데, 지난 4월21일 버마(미얀마) 양곤병원에서 84살을 일기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대답 없을 편지를 쓰려니 마음이 먹먹합니다.

선생님은 버마의 최장기(19년2개월) 양심수셨지요. 선생님은 행동하는 언론인이셨습니다. 군사정권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88항쟁’(1988년 8월8일 벌인 대규모 시위) 당시 언론연맹 부위원장으로 항쟁에 적극 참가하셨습니다. 1988년 9월엔 아웅산 수치 여사와 민족민주연맹(NLD)을 창립해 권력을 장악한 군부와 ‘정면 대결’을 하셨고요. 군부가 가만있을 리 없지요. 1989년 7월 체포된 선생님은 극심한 고문과 폭력을 당하셨습니다. 군부는 군용견 사육을 목적으로 설계된 시설에 선생님을 수감한 뒤 때로 물과 식사도 주지 않았습니다. 고문의 잔혹함은 나이·건강·성별을 가리지 않는 법인데, 육순에 접어든 선생님이 당하신 고초가 어떠했을지 참으로 지독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고문에 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악명 높은 인세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들을 일으켜세웠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도소의 인권유린에 저항했고 그 실태를 유엔에 알리셨지요. 선생님의 끊이지 않는 외침은 국제사회를 움직였고, 아웅산 수치에 대한 가택연금과 정치범 문제는 국제적 이슈가 됐습니다.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감옥에서 피워올린 투쟁의 봉화는 군사정권에 짓밟힌 버마 민중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원래 3년형을 선고받으셨지만 두 차례에 걸쳐 형이 추가됐고, 결국 19년을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느끼셨을 분노와 울분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서 풀려나신 것은 2008년 9월이었지요. 선생님은 교도관들 모르게 수의를 가지고 나오셨고, 그 수의는 영면하실 때까지 선생님의 ‘영원한 한 벌 옷’이 됐습니다.

» 버마 최장기 양심수 우윈틴이 아웅산 수치의 이름을 적은 오른손을 들어 수치에 대한 지지의 뜻을 표하고 있다(위). 우윈틴이 수감돼 있던 2006년 12월, 그의 조카 틴티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국경 없는 기자회’가 주는 상을 대신 받은 뒤 수상 연설을 하고 있다(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AP 제공

버마와 한국의 수의는 똑같은 색

감옥에서 18년을 살아왔던 저는 선생님의 수의가 의미하는 바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았는데도 눈가가 젖어들었으니까요. 버마나 한국이나 수의는 똑같은 색깔이더군요. 저도 그 수의를 입고 18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선생님은 19년 감옥살이는 물론 2008년 출소한 이래 영면하시기까지 그 수의를 입고 계셨으니 선생님의 인생은 푸른 수의의 삶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 정치범들과 부족한 음식을 나눠먹었고, 똑같은 마음으로 함께 싸웠고, 함께 울었다. 나는 풀려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갇혀 있다. 단 한 명의 정치범이라도 존재하는 한 나는 이 수의를 입고 있을 것”이라고 하셨던 선생님. 선생님에게 푸른 수의란 기나긴 민주주의 항쟁의 상징이며,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양심수들과의 깊은 연대를 뜻하겠지요.

저에게 수의란 처음엔 ‘갇힘’과 ‘억울함’의 표상이었습니다. 선생님과 달리 저는 제 가족만을 알던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습니다. 1981년 3월7일, 새근새근 잠자던 5살 아들과 3살 된 딸, 아내 뱃속에 있던 막내를 남겨둔 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끌려오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한국도 버마처럼 신군부의 쿠데타로 많은 광주 시민이 죽어갔고 수많은 양심들이 감옥에 끌려간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안기부에서 차마 사람의 짓이라고 할 수 없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스스로 ‘간첩’임을 자백할 때까지, 만삭의 아내를 데려와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겠다는 협박과 공포 속에 있을 때조차, 저는 ‘뭔가 오해가 생긴 것이니 재판만 받으면 나가겠지’ 하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1심 사형과 2심 무기징역이 선고됐고, 그때부터 이유 없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푸른 수의가 저주스러웠습니다. 분노와 좌절과 억울함으로 하루하루 버텼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 한 사건들은 그때부터 이어졌습니다. 보잘것없이 그저 감옥에서나 살고 있는 저를 기억해준 의로운 목소리들이었습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나라의 시민들이 보내준 따뜻한 위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인권활동가들의 격려와 지원.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만, 이제까지 내가 알던 세계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단 한 번의 의문도 갖지 않았던 질문이 솟아났습니다. ‘이 나라는 도대체 나와 내 가족에게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인가’…. 이 죽음 같은 운명 속에서도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를 캐묻기 시작했고 그 의문이 나를 변하게 만들더군요.

민주주의냐 군부냐, 엄중한 갈림길의 버마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고통이 보이고, 잘못된 권력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용기와 헌신에 존경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제가 입던 수의도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억울함에서 고통을 넘어서자는 어떤 결기로 다가왔습니다. 억울함을 풀게 되는 날이 오면 이 시간을 잊지 않겠다며, 나와 같은 억울한 이들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는 마음도 먹었습니다.

고문피해자였던 선생님은 다른 피해자들의 고통에 누구보다 공감했고, 고통을 나누려 애쓰셨습니다. 그 결정체가 바로 ‘한타와디 우윈틴재단’이었지요. 80살로 풀려난 선생님은 거주할 집도 모아놓은 돈도 하나 없었습니다. 오랜 친구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친구 집 정원에 있는 작은 판잣집에서 지내셨지요. 무일푼이었지만 외국의 친구들이 한푼 두푼 모아준 돈으로 고문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감옥에서 투쟁하다 사망한 정치범 가족들을 찾아가서는 “당신의 부모(아들딸)는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영예로운 사람”이라고 위로하셨다지요. 부모를 감옥에 빼앗겨 고아로 남겨진 자녀들을 찾아내 자부심을 갖도록 도우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가슴 저 밑바닥이 뜨거워졌습니다. 사람은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마의 고문피해자들에게 그 단 한 사람은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두 달 전 영원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선생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의 가족 같더군요. 누워 계신 선생님께 무릎 꿇어 예를 다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 선생님이 진실로 격려하고 지지했던 고문피해자들의 자녀, 선생님을 ‘세야’(saya·존경하는 큰어른을 일컫는 버마어)라 부르며 따르던 젊은 활동가들의 모습…. 제 눈에 비친 장례식엔 손님과 가족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군사독재가 고문과 폭력, 장기 집권을 통해 파괴하려 했던 것은 고문피해자와 그 가족, 나아가 시민 공동체의 존엄과 의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윈틴재단을 통한 선생님의 눈물겨운 노력과 격려는 고문피해자의 삶과 공동체의 존엄을 일으켜세웠다는 사실을 장례식이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우윈틴 선생님, 선생님의 조국 버마는 2015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주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가느냐, 다시 군부의 영향 아래 놓이느냐 엄중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버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아직 시작일 뿐”이며 “기나긴 터널의 저쪽 끝에 나타난 빛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군부의 검은 그림자가 여전히 버마를 뒤덮고 있다”고 우려하셨습니다. “모든 민중이 단결해서 군부를 이겨내야 한다”고도 하셨지요. 단결의 중심에 서 계시던 선생님이 이 시기에 눈을 감으신 것은 버마 민주주의 공동체에는 더할 수 없는 상실이고 슬픔일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 선생님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대한민국의 고문생존자인 저희가 선생님을 기리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생님이 사랑하셨던 많은 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생태계를 2억 년 지킨 벌처럼

선생님의 삶은 벌들의 세계로 보자면 정찰벌과 많이 닮았습니다. 정찰벌은 가장 부지런히 먼 곳까지 날아가 좋은 꿀이 있는 곳을 찾아냅니다. 마을로 돌아와 동네 벌들에게 ‘어디 가면 좋은 꿀이 있어’ 하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벌들이 정찰벌을 따라나서는 모습은 장관입니다. 믿고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러곤 꿀을 모아옵니다.

물론 저는 얌체처럼 벌들의 수고와 땀을 쏙쏙 빼먹고 삽니다만, 정찰벌의 노동 앞에 경의를 표하곤 합니다. 남들보다 더 멀리 날아가 힘든 여행도 마다하지 않고 좋은 꿀을 찾아내는 정찰벌. 그들의 노력 덕분에 벌들은 지구 생태계를 2억 년 넘게 지켜왔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극악한 군부독재의 폭력에도 버마 민주주의 공동체를 지켜온 힘, 그 중심에 선생의 전 생애가 있었습니다. 비록 잠드셨어도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젊은 세대의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되실 것입니다.

인간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온 생애로 증명하신 우윈틴 선생님.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고이 잠드소서.

박동운 재단법인 진실의힘 이사장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324.html